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산리 방법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"청산리 방법"이라는 이름은, 김일성이 [[1960년]] 2월경 [[평안남도]] [[강서군]] 청산리의 협동농장에서 그곳 농민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지낸 뒤 교시하였다는 데서 비롯되었다. 당시(1950년대 말) 북한은, 전후복구와 농업집단화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[[천리마 운동]]을 한창 진행하던 고도성장기 상태였다.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북한 농업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. 이때 내린 교시, 즉 청산리 방법의 핵심 내용은, 1) 위아래가 서로 도와줄 것, 2) 현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, 3) 대민사업과 정치사업을 중시할 것, 4) 대중의 자발적인 열성과 창의성을 동원할 것 등이었다. 즉 거창하게 말하면 "'''당 소속 지도 일꾼이 현장에서 군중과 함께 고생해가며 일하면서 군중의 사상을 각성시키고 그들의 창조적 지혜와 적극성을 발동시켜 당 정책 관철에 혁신을 일으키도록 한다"''', 풀어서 말하면 "조직의 관료제화를 경계하고, 인민들에게는 로동당이 공산주의 사상을 투철하게 주입시켜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하자"는 내용쯤 되시겠다. 놀랍게도 이 방법은 '''한 몇 년 간은''' 꽤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다. 생산이라는 목표만 가지고 채찍질을 가한 게 아닌 당원-즉 사회 지도층-과 함께 일하며 사상 교육을 겸하며 받아가는 관료주의의 극복과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창조성 유도라는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. 그래서 정말로 경제적으로 잘 발전되기 시작했고(!) 사회 도덕 규범도 잘 세워져 나름 괜찮은 나라가 '''되려고 했었다'''. 탈북자의 실제 증언에 의하면 한 마을 사람들끼리 문도 안 닫고 지냈다고.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정작 정치사업을 틀어쥔 당의 권위만 강해졌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별 도움이 안 되고 말았다(...)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